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반니 트라파토니 (문단 편집) === 지도자 경력 === [[파일:external/www.storiedicalcio.altervista.org/Trapattoni_Platini_poster.jpg]] '''애제자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1974년 트라파토니는 [[AC 밀란]] 유스 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 뒤 1975년 정식 감독으로 승격이 되지만 별 다른 기록 없이 1976년 [[유벤투스 FC|유벤투스]]로 감독직을 옮긴다. 그리고 10년동안 유벤투스의 감독을 하며 황금시대를 연다.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에서 여섯 차례의 스쿠데토과 2차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하며 이탈리아 제패는 물론이고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과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2회 우승, 지금은 폐지된 [[UEFA 컵위너스컵|컵위너스컵]][* 각 리그별 FA컵 우승팀만 참가] 1회 우승과 UEFA 슈퍼컵 1회 우승, 도요타컵[* 현 [[FIFA 클럽 월드컵]]] 1회 우승 등 10년 동안의 유벤투스 감독 생활 동안 무려 1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UEFA 주관 3개 대회인 유로피언컵, UEFA컵, 컵위너스컵을 모두 우승한 것은 [[우도 라테크]]가 최초이나 도요타컵까지 포함하면 트라파토니가 유일하다.] 10년간의 유벤투스 감독 생활을 마치고 트라파토니는 라이벌팀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인터 밀란]]으로 감독직을 옮긴다. 당시 인터 밀란은 1979-80 시즌 이후 리그 타이틀은 물론 각종 대외컵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지 않아 트라파토니를 영입한 것인데 감독직을 옮긴 첫 해인 1986-87 시즌엔 [[디에고 마라도나]]의 [[SSC 나폴리]]가, 그 다음시즌인 1987-88 시즌에는 [[아리고 사키]] 감독이 이끄는 [[AC 밀란]]이 리그 타이틀을 가져갔지만 세 번째 시즌인 1988-89 시즌에는 8년만에 인터 밀란에게 리그 타이틀을 가져다 줬다. 그리고 마지막 시즌인 1990-91 시즌에는 UE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인터 밀란은 트라파토니가 가져다준 1990-91 시즌 이후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 리그 탈환을 꿈꿨다. 그러나 유벤투스와 AC 밀란 양강체제에 밀리고 2000년에는 로마를 연고지로 한 [[AS 로마]]와 [[SS 라치오|라치오]]에게까지 밀리며 돈은 많이쓰는데 쓰는 만큼 효과는 못보는 클럽으로 전락하였다가 2006년 칼치오폴리 사태로 인해 2005-06 시즌 우승한 유벤투스가 우승 박탈 당한 어부지리로 기분 묘하게 리그 타이틀을 이어받았다.][* 그 이후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당하고 밀란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베총리]]가 제대로 된 보강을 하지 않고 노인정이라고 조롱당하면서 몰락하는 동안 인테르는 리그를 재패하기 시작하고 [[주제 무리뉴|조세 무리뉴]]를 감독으로 앉히며 2009-10 시즌에는 마침내 45년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함께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트레블을 달성하며 황금시대를 열게 됐다...가 아니라 그 이후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이 리버풀을 7위로 만든데 이어 인테르 역시 7테르를 만드는 막장 행각을 보이며 결국 AC 밀란에게 왕좌 자리를 6시즌 만에 내줬다.] 인터 밀란을 떠난 직후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로 5년만에 복귀한다. 하지만 아리고 사키에 이어 AC 밀란의 감독직을 이어 받은 [[파비오 카펠로]]가 화려한 멤버들을 앞세워 58경기 무패 등 각종 기록을 수립하며 리그 3연패를 달성하게 되며 트라파토니는 그 동안 UEFA컵 우승 1회를 제외하곤 유벤투스 1기 시절과 비교하면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1994년 여름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를 떠나고 후임 감독으로는 훗날 트라파토니에 필적하는 명장으로 올라 서게 되는 [[마르첼로 리피]]가 임명된다. 1994-95 시즌 트라파토니는 처음으로 해외 감독 생활을 하게 된다. 독일의 명문 구단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에른 뮌헨]]으로 자리를 옮긴다. 첫 해외 감독생활이었던 94-95 시즌은 히츠펠트 감독이 이끌고 돈지X로 대형 선수를 수집한 도르트문트에게 밀려 무관으로 보냈고 원할하지 않은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다음 시즌인 1995-96 시즌에 세리에 A의 칼리아리로 자리를 옮기며 이탈리아로 복귀하였으나 리그 11위를 기록,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른 감독 자리를 찾아 옮겼는데 그게 1년전에 어려움을 겪어 떠난 바이에른 뮌헨 그래도 그는 96-97 시즌에 바이에른을 3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며, 다시 독일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 성공을 이어가는데 실패하였다. 당시 선수들은 감독한테 대들며 훈련을 게을리 하였고, 선수들이 스포츠 잡지보다 촌평지에 더 많이 나와 FC 할리우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의 불화로 팀의 케미가 흔들렸고, 클린스만은 언론에 트라파토니 감독의 수비 위주의 전술을 대놓고 비난했다. 급기야 경기 도중 트라파토니가 교체로 빼자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트라파토니 감독에서 욕설을 하고 광고판을 발로 차 부서트리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리는 추태를 보였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클린스만은 삼프도리아로 이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3월 10일 폭발한 트라파토니는 레전드로 남을 분노의 기자회견을 시전하였다. 말그대로 바이에른 뮌헨 공식 채널에서 Trapattoni's legendary press conference(트라파토니의 전설적인 기자회견)이라는 영상으로도 올려져 있다. 유튜브에 여러 자막 버전으로 올라와 있다. [youtube(OCFj9lf8IQE)] [youtube(ZUgr3-jPvDw)]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영상에 트라파토니 인터뷰를 더빙한 패러디 영상. 여기서 가장 많이 지목된 선수는 [[토마스 슈트룬츠]], 그는 [[유리몸]]이 되어 2년간 10경기도 채 뛰지 못하였고 거의 맨날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는 97-98 시즌에 DFB-포칼 우승 이후 뮌헨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1998-99 시즌에 다시 [[ACF 피오렌티나|피오렌티나]]의 감독으로 이탈리아로 컴백하며 곧바로 리그 3위를 기록, 팀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그 다음 시즌인 1999-00 시즌에는 7위를 기록하며 부진을 겪었다. 1999-00시즌이 끝난 뒤 트라파토니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 쉽게 예선을 통과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정작 2002 월드컵 본선에 올라가자 같은 조에 있던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에콰도르]]는 가볍게 잡았으나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전에서 패배하고[* 다만 이탈리아의 골을 취소시킨 오프사이드에 대한 오심 논란이 있었다.]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전에서는 겨우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부진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전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히딩크호|한국]]에 생각지도 못하게 패배하며 16강전에서 탈락(15위)하였다.[* 이때 정말 시종일관 가만있질 못하고 분노 표출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잡혔다. 이전 경기에서의 영 좋지못한 실적으로 인해 본인도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비에리가 첫골을 기록했을 때 그나마 숨통이 트이나 싶더니 거친 플레이로 계속해서 자기 선수들이 경고를 받자 그간 쌓여있던게 폭발했던듯 하다. 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히딩크와는 대조적인 모습.] 대회 직전 부상에서 회복한 [[로베르토 바조]]를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격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어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실망스러운 조기 탈락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여론은 트라파토니 감독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을 탓하며 면죄부를 주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진은 2년 뒤에 개최된 [[UEFA 유로 2004]][* 16강 본선]에서도 이어졌는데 이 대회에선 아예 조별 리그[* 16강 조별 리그]에서 광탈(9위)로 8강 진출 실패하는 비참한 성적을 남기며 트라파토니의 감독 커리어 사상 가장 큰 실패를 맛보게 된다.[* 칼리아리와 피오렌티나 지휘봉을 잡던 당시의 성적도 좋지 못하긴 하지만 화려한 선수진을 보유했던 이탈리아 대표팀과는 달리 애초에 그 팀들은 우승을 노릴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UEFA 유로 2004/C조]], [[승자승 원칙]] 문서도 참고.] 덴마크와의 1차전에서 공격 포메이션에 델피에로-토티-비에리-카모라네시의 4중주를 기용한 것이 무득점으로 실패했고 에이스 토티마저 상대 선수에게 침 뱉는 사건 때문에 징계로 빠지고 말았다. 스웨덴과의 2차전에서 1차전의 4-4-2 대신 피를로와 가투소를 중앙 미드필더에 기용하는 4-3-1-2로 전술을 수정하자 경기력이 나아졌고 토티 대신 기용한 카사노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비에리의 부진 등으로 추가득점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1골차를 지키려는 조급증이 앞서며 공격을 이끌던 카사노와 델피에로를 모두 교체했는데 경기 종료 직전에 이브라히모비치에게 백힐 동점골을 헌납한 점이 가장 뼈아팠다. 무엇보다도 세리에 A 득점 2위이자 토종 득점 1위를 기록했던 [[AC 파르마]]의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본선에 데려가지 않고 노쇠화로 폼이 저하되기 시작된 비에리에 집착한 모습은 그의 실책이었다. 부임하기 직전의 이탈리아가 유로 2000 준우승, 퇴임 이후의 이탈리아가 2006 월드컵 우승을 이루어내면서 트라파토니에 대한 평가는 더욱 추락했다. 세매에서는 이탈리아 국대 한정으로 [[잔 피에로 벤투라]] 다음으로 나쁜 감독으로 칠 정도다. 2004년 좋지 않은 모습으로 국가대표팀을 떠났으나 다행히 트라파토니를 찾아주는 팀은 있었는데 바로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의 명문 클럽 벤피카. 2004-05 시즌, 트라파토니는 벤피카를 11년만에 리가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나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고 1년만에 팀을 떠난다. 그 다음 행선지였던 [[분데스리가]]의 [[VfB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예스퍼 그론캬르]]와 [[욘 달 토마손]] 등 선수진과 갈등을 일으켰고, 팀 성적도 부진하며 20경기만에 해고당하게 된다. 2006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고, 애제자인 [[로타어 마테우스]]를 (부)감독으로 영입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트라파토니와 마테우스 2인 지도 체제로 운영되었고, 2006-07 시즌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독특한 2인 지도 체제는 당시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둘 간의 지휘 체계가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둘 간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시즌이 끝난 후 리그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라파토니는 이사회 회의에서 마테우스를 경질시켰다. 2008년에는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0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기록 하는 등 선전하면서 무패로 지역예선을 마감했다. 지역예선에서 조 2위를 기록하고 월드컵 본선[* 32강 본선] 티켓을 위한 플레이오프로 진출했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프랑스. 홈에서 0:1로 패배했지만 원정에선 로비 킨의 골로 1:1무승부가 되는 가 싶더니 막판에 갈라스의 골로 1:2로 역전당해 패배했다. 다만 리플레이 확인 결과 갈라스가 크로스를 올리기 전에 앙리가 두 차례나 그의 손으로 볼을 터치 하는것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한게 없고 결국 2010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에는 트라파토니에게 연장계약을 제시했고 트라파토니는 유로 2012 본선[* 16개국 본선]에서도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나 크로아티아, 스페인, 이탈리아와의 본선 조별 리그[* 16강 조별리그]에서 모두 패해 탈락(16위)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아일랜드 축구협회는 연장 계약을 제시하여 2014 브라질 월드컵 까지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 카자흐스탄, 페로 제도와 같은 조로 편성이 되었으나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에게 밀려 조 4위로 월드컵 본선[* 32개국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진출 실패 직후, 아일랜드 축구협회와 상호 동의하에 계약을 해지 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맨유]]의 [[알렉스 퍼거슨|퍼거슨]]을 능가하는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트라파토니의 전성기가 완전히 끝난 반면 퍼거슨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한번 전성기를 구가하고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꾸준했기에 평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트라파토니 뿐 아니라 히츠펠트나 카펠로도 전성기때는 퍼거슨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았다. 둘 다 위대한 10년이 지난후 무너져서 문제였지. 트라파토니의 전성기는 이 둘 보다 길었지만 그도 말년에는 허물어져 퍼거슨만큼 롱런하진 못했다. 그렇기에 트라파토니, 히츠펠트, 카펠로와 비교하여 알렉스 퍼거슨이 그들을 능가하는 명장으로 평가받게 된다.] 국가대표와는 인연이 없는 탓에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하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유로]] 타이틀과 [[FIFA 월드컵|월드컵]]은 끝내 획득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